나훈아 : 1947년에 태어났다. 1966년에 가수로 데뷔했다. 1976년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였던 김지미와 동거했다. 40년 동안 2500여곡의 노래를 부르고, 800여곡을 직접 작곡했으며, 그 노래들을 “200여장의 앨범에 담아 2000만장의 앨범을 판매”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4일 동안 열린 1만 1천석 규모의 40주년 기념 공연을 전회 매진 시켰다. 1975년생 김선아, 1970년생 김혜수와 스캔들이 났다는 루머가 돌았다.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전국민의 숨을 죽이게 했”다. 나훈아는 전설이 아니다. 나훈아는 톱스타다. 42년째. ///////////////////////////////////////////////////////////////////////////////////////////////////// "노래인생 40년 깨달음? 오직 연습뿐이라는 것" 07.06.25
송대관 : 가수. 나훈아와 오아시스 레코드에서 무명 시절을 함께 보냈다. 나훈아가 ‘천리길’,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으로 데뷔 직후 빠르게 인기를 얻은 반면 송대관은 오랜 무명 시절을 견뎌야 했다. 송대관에 따르면 당시 나훈아는 의리가 많아 성공한 뒤에는 오아시스 레코드사에 들를 때마다 자신에게 중국 음식을 사고, 지방공연마다 자신을 데려가기도 했으며, 송대관 보다 일찍 성공한 후배 가수가 송대관을 무시하는 듯하자 그를 대신 혼내주기도 했다고. 아버지가 무역업을 해서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고, 그 자신도 “고생하지 않고 인기를 얻었다”고 할 정도로 빠르게 스타가 된 탓인지 나훈아는 넉넉한 인심에 호방한 성격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한 때는 집 한 채에 20만 원씩 하던 시절 오아시스 레코드 사장 손진석에게 “판이 잘 팔려서 회사 갈 때마다 50만원, 100만원씩 받으면” 그 돈을 모두 친구들 밥 먹이는데 쓰기도 했다고. 이런 인간적 매력에 태권도와 야구 등으로 다져진 몸, 까무잡잡한 피부와 선 굵은 외모가 더해져 나훈아는 1971년 <선데이 서울>에서 ‘섹스 어필’하는 가수라고 표현할 만큼 화제가 됐다. 당시 가수를 꿈꾸던 조방헌이라는 청년은 영화배우 태현실과 가수 남진과 나훈아에서 이름을 한글자씩 따서 태진아라는 가명을 짓기도 했으니, 나훈아는 한국 스타 산업의 출발이었던 셈.
남진 : 가수. 1970년대 나훈아와 함께 가요계를 양분했다. 인기를 뒤로 한 채 월남으로 파병갔던 남진이 나훈아가 인기라는 소식에 휴가를 얻어 ‘사랑이 스쳐간 상처’를 발표, 나훈아의 ‘두 줄기 눈물’을 제치고 가요 차트 정상을 차지하면서 라이벌전이 시작됐다. 남진은 제대 뒤 1972년 팬클럽을 창단, 그 해 6월 4천여명의 팬들과 야유회를 떠나며 세를 과시했고, 나훈아는 “나와 당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입을 옷”이라며 아기 옷을 보낸 팬의 편지를 비롯, 하루 100여통의 팬레터를 받았다. 그들이 1972년 같은 장소에서 연 리사이틀은 나훈아가 5만, 남진이 3만 관객을 동원했고, 당시 TBC-TV의 간판 쇼프로그램 <쇼쇼쇼>가 남진-펄시스터즈와의 조인트 리사이틀을 열자 MBC는 나훈아를 지원하는 등 방송사의 자존심 싸움까지 끼어들었다. 나훈아는 한 때 남진보다 두 살 어린 자신의 나이를 동갑으로 올렸고, 자신이 남진의 사주를 받았다는 한 정신이상자가 나훈아를 깨진 사이다 병으로 습격, 나훈아의 목이 찔리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남진은 결백한 것으로 밝혀졌다. 1970년대에는 사석에서 같은 자리조차 있지 않았던 두 사람은 1980년대에 화해했다. 1983년 나훈아가 자신이 운영하던 ‘은성 카바레’에 남진을 섭외, 여기에 남진이 선뜻 응해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서로 과거의 감정을 털어냈다고.
강진 : 가수. 나훈아의 ‘땡벌’을 리메이크했다. 나훈아가 20여 년 전에 작곡한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아내와 함께 나훈아를 찾아갔고, 강진의 성의에 마음이 움직인 나훈아는 직접 녹음까지 하며 이 노래를 강진에게 지도했다. 나훈아가 40여 년 동안 스타로 남아있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꾸준히 사랑받는 그의 자작곡이 원동력이다. ‘무시로’, ‘잡초’, ‘갈무리’ 등 그의 히트곡 중 상당수가 그의 자작곡이고, 그는 공연에서 자작곡 시간을 따로 둘 정도로 곡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나훈아는 어린 시절 영향 받은 민요에 자신의 창법을 결합, 국내에서 트롯, 혹은 뽕짝 특유의 꺾기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리고 그는 “뽕짝이 단지 2/4박자의 리듬을 나타내는 소리이지 뜻을 가진 말이 아니고, 트로트는 어원이 영어 ‘Trot’에서 비롯된 말이며 이것 역시 음악의 2/4박자의 리듬의 뜻을 나타내기에” 뽕짝이나 트롯대신 ‘아리랑’이라는 말을 쓰자고 주장한다. 물론 국악 관계자들은 “일본의 황민화 정책에 활용되면서 시작된 트롯을 아리랑으로 부르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그의 주장을 반박하지만, 그만큼 나훈아는 자신의 음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음악을 연구한다.
김지미 : 영화배우. 나훈아와 1971년부터 교제를 시작, 1976년부터 1982년까지 6년 동안 결혼생활(동거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혼인신고는 했었다)을 하며 연예계 최고의 스캔들을 일으켰다. 둘의 결혼이 ‘스캔들’이 된 건 김지미의 결혼이 세 번째였고, 나훈아가 7살 연상의 김지미와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의 아내와 이혼했기 때문. 나훈아는 1973년에 은퇴와 함께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밝혔지만 지구레코드와 전속 연장계약을 맺으며 은퇴를 번복하고 극비리에 공군에 입대했고, 1976년 제대를 몇 개월 남겨둔 상태에서 이혼하고 김지미와 동거를 발표해 연예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 후 나훈아는 가수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훈아가 태양레코드와 2억 원에 계약을 맺고 가요계 복귀를 선언한 것을 계기로 불화설이 돌자 “(기왕 불화설이) 소문난 김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기며 이혼했다(김지미와 최무룡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며 이혼했다). 나훈아는 “여자는 혼자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김지미에게 가진 돈을 모두 주고, 서울 청량리의 ‘맘모스 카바레’에서 한 달에 1억 원씩 받기로 하고 노래를 부르기로 계약한 뒤 한 달 치를 선불 받아 3분의 2를 김지미에게 줬다. 나훈아는 김지미를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준 여인”으로 평하고, 김지미 역시 이혼 뒤 나훈아에 대해 어떤 안 좋은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나훈아는 재기에 성공, 1985년 당시 신인가수였던 여성과 결혼, 평탄한 삶을 살았다. 최근까지는.
배종옥 : 탤런트. KBS <우리가 남인가요>에 출연하던 당시 처음으로 드라마 타이틀을 작곡했던 나훈아와 ‘아담과 이브처럼’함께 불렀고, 이 인연이 이어져 나훈아의 콘서트에서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훈아는 2000년대 이후 자신의 공연에서 당시 인기 여성 스타들을 초대해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2002년에는 배종옥이, 2003년에는 1983년 영화 <3일밤 3일낮>에서 나훈아의 딸로 출연한 장서희가, 2005년에는 김선아가 함께 노래를 불렀다. 특히 김선아와 함께한 2005년 공연은 MBC에서 <나훈아의 아리수>라는 이름으로 방영, 전국 시청률 17.8%로 영화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등을 제치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인기 여성 연예인부터 화려한 특수효과, 그리고 나훈아의 지치지 않는 무대를 볼 수 있는 나훈아의 콘서트는 한국에서 중년이상의 관객들에게 문화적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옷 로비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나훈아의 공연 티켓은 장관 부인들에게 제공될 선물 중 하나로 거론됐고, 호텔 업계에서 한 명당 15만 원 가량 하는 나훈아의 디너쇼는 ‘그랜드 힐튼 호텔의 1020석을 4일 연속 매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공연이다. 또한 나훈아의 공연을 보는 관객 중 70%는 늘 입소문을 듣고 온 새로운 관객이다. 나훈아는 과거 공군 복무 시절 군 위문 공연에서 2시간 10분 동안 혼자 무대를 이끌고, 자신의 기자회견마저 마치 콘서트를 보여주듯 강렬한 ‘퍼포먼스’로 장식하는 그의 무대 장악력은 그의 공연에 빨려들도록 만든다. 또한 그는 1972년 남진과 공연 경쟁을 펼치면서 기존 트로트에 당시 유행하던 팝과 포크, 전통 북치기와 가극 ‘갑돌이와 갑순이’까지 넣은 진보적인 공연 마인드를 선보였고, 그 뒤부터 꾸준히 자신의 공연을 발전시켜 공연에서 대형 거북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홍시’를 레게로 편곡하며, 안드레아 보첼리의 음악까지 소화하는 그만의 블록버스터 콘서트를 완성시켰다.
주현미 : 가수. 나훈아가 1986년에 설립한 아라기획에서 나훈아와 함께 메들리 카세트 테이프를 발표했다. 당시 이 메들리 카세트 테이프는 ‘메들리 시장’을 석권했다. 나훈아는 현재 미국에서 별도의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등 수백억대의 자산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철저하게 팬들을 중심으로 한 나훈아의 마케팅이 밑바탕이 됐다. 그는 TV와 접촉을 끊고 공연에만 매달리면서 공연의 희소성을 높여 회당 억대의 개런티를 받고, 공연장에서 그의 팬에게 새로 발매된 DVD와 앨범, 각종 기념품 등 관련 상품을 팔아 다시 수익을 얻는다. 여기에 자신의 브랜드 파워를 이용해 음치 클리닉 비디오인 <대한민국 나훈아>등도 판매하고, 모든 관련 수익은 아라기획에서 관리한다. 그는 매체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독립적인 시장구조를 가졌고, 오직 공연과 앨범 같은 콘텐츠의 힘만으로 소비자를 늘려나갔다. 물론, 이것은 노래를 위해 하루에 4갑을 피던 담배를 끊고, 두 시간씩 운동을 하며, 필요하다면 공연에서 13억 원어치 다이아몬드가 박힌 옷을 입는 나훈아의 철저한 자기 관리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상벽 : MC. MC가 되기 전 경향신문과 주간경향에서 연예부 기자를 했고, 당시 나훈아가 괴한에게 습격당한 것을 취재하며 그와 친해졌다. 나훈아는 이상벽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하룻밤을 꼬박 그의 곁을 지켰고, 나훈아가 언론과 거의 접촉하지 않은 뒤에도 이상벽과는 함께 목욕탕을 가고, 미국 공연을 동행하며 우정을 나눴다. 이상벽에 따르면 나훈아는 “한국 최고의 스타가 제대로 대우를 받아야 다른 가수들도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해외 공연 시에는 늘 최고급 객실에서 묵고, 호텔 종업원들에게는 몇 백 달러씩 팁을 줬다고 한다. 나훈아는 평소 “스타는 하늘의 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공연 외에는 대중에게 자신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1980년대 이후로는 매체와의 접촉을 점점 줄여왔다. 그는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30%쯤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야 나머지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위치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여유가 있다.
또한 SBS <김혜수의 플러스 유>에 출연했을 당시에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들고 나와 자신의 탄탄한 몸매와 뽕짝의 음악적인 해설을 술술 풀어놓아 자신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옛날 트롯 가수’에서 젊은 오빠로 이미지를 바꿀 만큼 자기 연출에 능하다. 원하는 콘셉트를 100% 연출하기 위해 의상협찬을 받지 않는 철저한 자기 관리,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래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냉정함, <비즈니스 위크>를 꾸준히 읽으며 사업감각을 유지하는 사업가적 마인드를 고루 갖춘 남자가 예술가와 스타의 기질까지 동시에 가지면서 데뷔 41년째에 기자들 앞에서 호령을 할 수 있는 톱스타가 됐다. 루머가 퍼지면서 나훈아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게 아니라, 나훈아에 대한 관심이 루머를 만들어냈다. 그는, 이미 톱스타였으니까. 42년째.
[나훈아]"노래인생 40년 깨달음?오직 연습뿐이라는 것"
데뷔40년 앞두고 기념앨범
"내 스타일은 어쩌면 남대문서 수건매고 장사하는것… 다시 태어나면 노래 안할랍니다
" 남진하고 경쟁은 결국 공생공존… 승패요? 각자의 길 갔을뿐…
운동안하면 2시간도 공연못해… 스타가 배 불뚝 나오면 안되죠
한 마리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 지난 14일 오후 여의도 MBC 방송센터에서 만난 나훈아(58).
질박한 경상도 억양으로 인사를 건네는 그와 악수를 하면 손이 뻐근하다. 청바지에
검은 재킷 위로 드러나는 몸매, 군살 하나 없다. 부릅뜬 눈 주변의 팽팽한 피부에서도 세월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머리칼과 수염을 물들이고 있는 흰 빛은 옹골찬 39년 노래 인생을
상징하는 ‘훈장’이다.
―내년이면 데뷔 40주년이다. 기분이 어떤가? 오랜 세월 깨달음이 있다면.
“특별한 건 없다. 연습, 연습, 연습 뿐이라는 것 정도? 초등학교 4학년도 다 느끼는 것일거다.
‘무슨 일을 하든 연습만이 최상의 길’이라는 걸 매번 깨닫고 있다.
―무대 이외의 곳에서는 왜 이렇게 만나기가 힘든가?
“스타가 뭔가?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다. 그리고 꿈을 파는 사람이다. 관객은 꿈을 사러 오는
사람이고. 우리는 그대로 꿈이고 별이어야 한다. 대중이 스타에 대해 이것저것 다 알아버리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66년 데뷔, 소리를 꺾고 비틀며 감정을 집어넣는 창법을 창조한 ‘트로트 황제’는 아직도 날이 서 있다. 노래인생 40주년을 앞두고 신곡으로 채워진 기념앨범 ‘벗’, ‘뉴 프리 스타일(New Free Style)’을
발매했고, 지난 10일에는 한강 노들섬에서 광복 60주년 기념 대형공연 ‘나훈아의 아리수’
(17일 밤 9시40분 MBC 방영)를 펼쳐 1만4000여명 관객을 끌어모았다. ‘강촌에 살고싶네’,
‘머나먼 고향’, ‘고향역’,‘물레방아 도는데’, ‘고향무정’…. 숱한 고향 노래를 불러 명절이면 더욱
생각나는이 타고난 소리꾼.3년여 만에 인터뷰에 응한 그로부터 마음 깊은 곳 얘기들을 하나 둘
끄집어냈다
. ―음반사에서 사환 생활을 하며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고생한 끝에 데뷔했다는 얘기가 있다.
“하하, 다 거짓말이다. 옛날 기자들이 소설 쓴 거다. 무역상을 하던 아버지 덕에 부산 우리 집은
상당히 부자였다. 나 어렸을 때, 부산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4층이었는데 아버지가 3층짜리 건물을
갖고 있었으니. 옛 기사에는 내가 구두닦이를 했다는 내용도 있는데 우습다. 대학 간 형 따라서
서울로 왔고, 서라벌 예고 시절 학교에서 ‘노래 잘하는 녀석’으로 소문 나면서 오아시스 레코드 사장
앞에서 노래를 했다. 이어서 바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수록된 음반을 취입했다. 느닷없이 떠서
솔직히 제대로 된 신인시절이 없었다.”
―나훈아 하면, 60~70년대 남진과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그야말로 ‘공생공존(共生共存)’이었는데 정말 대단한 시절이었다. 남진은 전라도 출신에 하얗고
예쁘장하게 즉 도회적으로 생겼고, 나는 경상도 촌놈에 시커먼 게 소도둑처럼 생겼으니 완전히
대조적인 거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 등 지역을 대표하는 두 정치인의 대결구도에 편승한 측면도 있다.”
―두 사람의 경쟁은 누구의 승리로 끝난 걸까?
“글쎄, 각자의 길을 갔기 때문에 승패를 가늠할 수 없다. 남진은 크든 작든 많은 무대에 서서
자신의 끼를 발산하는 스타일이고, 나는 배가 고파 라면 하나를 먹는 한이 있어도 내가 설 자리가
아니면 나서지 않는 식이었다.
―”남진이 시켰다”고 횡설수설하며 한 관객이 무대에 뛰어올라와 사이다 병을 휘둘러 얼굴을
70바늘이나 꿰맨 사건도 있었다.
“아마 목포 공연이었던 것 같다. UDT 출신이라던데, 하여튼 죽을 뻔 했다. 내가 완력이 있으니까
이 정도지 목을 겨냥하고 들어왔으니 다른 가수였으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다. 당시 무대에서
10여분간 싸웠는데, 관객들은 장난인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다 피가 쏟아지는 걸 보고 경찰이
출동했다.”
이어,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나훈아가 자신의 왼쪽 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직도
굵은 흉터가 선연하게 얼굴 한 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그 일 말고도 연예인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깡패들과 싸운 일이 여러 번. 그래서 7번쯤 경찰서에 들어갔다 훈방됐다”며 “쇼를 할
때마다 분장실에 찾아와 여자 무용수 가슴을 마구 주무르는 깡패들 작태를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당신은 타고난 소리꾼인 것 같다. 가수로서의 인생에 만족하나?
“다시 태어나면 노래 안 한다. 내 스타일은 어쩌면 남대문 시장에서 수건 하나 목에 매고 소리치며
장사하는 거다. 끝나면 저녁에 소주 한잔 마시며 옛 노래 부르고…. 그런데 이렇게 평생 노래하며
살고 있으니 항상 불만스럽다. 그래도 가수 또는 연예인으로 스스로 도취돼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반성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특유의 꺽고 비트는 창법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어려서 할머니 따라다니며 민요공연을 봤던 영향이다. 최희준, 남일해 등 선배들은
노래를 깨끗하게 불렀는데, 나는 민요에 바탕을 둔 창법으로 음을 이렇게 저렇게 꺾어 불렀다.
이후 후배들은 내 창법을 교과서처럼 따라하고 있다. 가요사에 남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 나훈아는 ‘트로트’라는 표현에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였다. “영어로 쓰면 ‘trot’인 ‘트로트’는
4분의 2박자인 리듬을 나타낼 뿐이다. 더구나 우리의 정서와 한을 담은 전통가요를 일컫는
명칭이 왜 외국어라야 하냐?”며 ‘트로트’ 대신 ‘아리랑’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는 몇개월전
각 방송사 음악 프로 관련 PD들에게 이런 생각을 담은 문건을 일제히 보낸 적도 있다.
―직접 작사, 작곡도 하는 당신의 음악활동은 끝이 없다.
“내 자랑 한번 하자. 이 정도로 긴 세월 노래하며 끊임없이 새 히트곡을 내는 가수가 있는가?
게다가 나는 80년대 이후 방송의 힘도 외면한 채, 라이브에만 전념했다. 마이클 잭슨만 봐도 예전
히트곡을 계속 우려먹지 않는가? 난 언더그라운드 아리랑 가수다. 이번에 나온 ‘벗’ 앨범은 유명
작곡가 14명이 나를 위해 곡을 써서 만들어진 기념비적 음반이다. 100년쯤 지나면 희귀앨범이 될 것이다.”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나? 20~30대 못지 않은 근육질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운동 안 하면 2시간 공연도 못한다. 빨리 걷는 운동을 한다. 대중 앞에 서는 스타가 배는 불뚝
나오고 살이나 디디(많이) 쪄있으면 어쩌겠나? 담배도 끊은지 5년이 넘었다. 사명감에서 한 일이다.”
나훈아는 사생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을 피했다. 85년 14년 연하의 후배가수 정수경씨와 결혼,
1남1녀를 두고 있다. 1970년대 당대의 여배우 김지미씨와의 열애설은 중년 팬들에게는 아직도
기억에 뚜렷한 ‘사건’. “예전 김지미씨와…”라고 운을 떼자 “어허 됐다니까”라며 슬쩍 웃어넘긴다.
인터뷰를 마친 뒤, 그는 ‘나훈아의 아리수’ 공연 녹화 테이프를 보며 제작진과 함께 편집 작업을
하고 있다. 거대한 성(城) 모양의 세트를 뚫고, 말을 탄 채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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